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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난 이후 수면장애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불면의 시작

재난을 겪은 많은 생존자들은 사고 직후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호소한다. 처음에는 불규칙한 수면, 자주 깨는 잠, 악몽 등이 나타나며, 시간이 지나면서 만성적인 불면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는 결코 ‘이겨내지 못한 약한 사람’의 반응이 아니다. 수면장애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며, 그 자체로 몸과 마음이 경험한 고통의 신호다.

재난 상황에서 인간의 뇌는 극도의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뇌의 편도체는 위험을 감지하면 자율신경계를 활성화시키고, 이는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과다 분비하게 만든다. 이런 상태에서는 신체가 휴식과 회복에 필요한 ‘수면 시스템’을 작동시키지 못한다. 즉, 몸이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 있다고 오인하고 긴장을 유지하면서, 깊은 수면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심리적 충격이 클수록 잠을 자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두려운 행위가 되기도 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재난 당시 자신이 잠든 상태였거나, 자고 있을 때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다는 경험을 갖고 있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내가 그때 깨어 있었더라면”이라는 죄책감이나 “또 무언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잠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처럼 수면장애는 단순히 수면 패턴의 문제가 아니라, 트라우마와 연결된 심리적 방어 반응인 경우가 많다.

재난 이후 수면장애: 원인과 회복 방법


2. 수면장애의 유형과 심리적 연결고리: 재난의 그림자

재난 이후 나타나는 수면장애는 단순히 잠을 못 이루는 ‘불면’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수면 문제들이 관찰된다. 대표적으로는 입면장애(잠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증상), 중간각성(자주 깨는 증상), 조기각성(새벽에 너무 일찍 깨는 증상), 악몽, 야경증(공포에 질려 깨어나는 증상) 등이 있다. 이처럼 수면장애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며, 각각의 증상은 트라우마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입면장애는 과도한 경계 상태와 관련이 깊다. 재난을 겪은 생존자는 잠자리에 들면 사고 당시의 기억이나 이미지가 떠올라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플래시백과 유사한 형태로, 침대에 누웠을 때 뇌가 ‘휴식하라’는 신호 대신 ‘주의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중간각성이나 조기각성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뇌가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 있다고 판단하면, 깊은 수면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고 반복적으로 깨게 만든다.

악몽은 재난 이후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수면 관련 증상 중 하나다. 생존자는 재난 당시의 장면, 소리, 감정을 꿈속에서 재경험한다. 때로는 사실과는 다른 형태로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하며,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흐르는 등 강한 신체 반응을 동반한다. 악몽이 반복될수록 잠드는 것이 두려워지고, 이는 다시 수면 회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든다.

야경증은 어린이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지만, 재난 이후 성인 생존자에게도 종종 관찰된다. 잠든 상태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거나 몸부림치며 깨는 현상으로, 의식이 완전히 깨기 전까지 주변과 단절된 상태가 지속된다. 이는 외상성 스트레스가 신경계에 과도하게 각인되어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런 모든 유형의 수면장애는 단순히 잠의 질을 낮추는 것을 넘어서, 생존자의 전반적인 기능을 악화시키며, 일상생활과 대인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3. 회복을 위한 수면 치유 전략: 심리적·신체적 접근의 통합

재난 이후 생존자의 수면장애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접근과 신체적 접근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수면장애는 단순한 불편함이나 습관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트라우마가 신경계와 자율신경계, 감정 기억 회로에 깊숙이 각인되면서 발생하는 전신 반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복 전략 역시 단편적인 방법에 의존하기보다, 다차원적이고 통합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첫 번째 핵심은 ‘수면의 심리적 안전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잠은 곧 방어를 내려놓는 행위이므로, 생존자에게 수면은 생존 본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활동이 된다. 이는 수면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으로 나타나며, 생존자가 “잠들면 안 된다”는 경계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이런 경우, 상담자는 먼저 수면 환경을 심리적으로 안정된 공간으로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밝기를 조절하거나, 특정한 소리(화이트 노이즈, 잔잔한 음악), 향(라벤더, 백단향 등)을 활용해 감각 자극을 통한 안정감을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둘째, 인지행동치료(CBT-I)는 외상 후 수면장애에 가장 근거가 확실한 심리치료 기법이다. 생존자들은 종종 “나는 원래 잠을 잘 못 자는 사람이야”, “악몽 때문에 잠드는 게 무서워” 같은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다. CBT-I는 이러한 비합리적 사고를 파악하고,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생각으로 대체하도록 돕는다. 또한 수면 시간 기록, 수면 위생 점검, 낮잠 제한, 수면 유도 루틴 설정 등 행동적 전략도 병행된다. 특히 수면을 억지로 시도하지 않도록 하는 ‘의도된 각성 전략’은 잠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수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효과적이다.

셋째, 신체 기반 안정화 기법도 반드시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 복식호흡, 점진적 근육이완(PMR), 요가, 명상은 모두 신경계의 과각성 상태를 완화하고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킨다. 이는 수면을 위한 생리적 조건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특히, 낮 동안 체내 긴장을 관리하는 것은 밤의 수면 질을 결정짓는 데 직결되기 때문에, 상담자는 생존자가 일상에서 이완 기법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넷째, 악몽과 관련된 치료도 중요하다. 반복적 악몽은 수면 회피와 깊은 공포 반응을 유도한다. 이때 사용할 수 있는 기법 중 하나는 이미지 리허설 치료(Image Rehearsal Therapy, IRT)이다. 생존자가 반복적으로 꾸는 악몽의 내용을 변화시켜 상상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꿈에 대한 통제감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반복적으로 화재를 경험하는 꿈을 꾸는 사람에게, ‘불이 꺼지고 구조대가 안전하게 도착하는 버전’을 상상하고 반복하게 하여, 실제 꿈의 내용을 수정하는 데 성공한 사례들이 있다. 이는 뇌의 기억 회로를 재조직하고, 감정 반응을 재조정하는 데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심리적 지지 기반의 집단 접근도 수면 회복에 도움이 된다. 집단상담 내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수면 문제를 나누고, 각자의 회복 전략을 공유하는 과정은 위안과 회복의 기제를 동시에 제공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인식은 심리적 압박감을 낮추고, 자기 회복 동기를 높인다. 재난 생존자의 수면 회복은 단지 잠을 자게 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삶의 컨트롤’을 되찾는 과정이며, 그 시작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신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4. 수면 회복은 곧 삶의 회복이다: 일상을 다시 살아가기 위한 조건

수면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 기능이자 회복의 기초다. 하지만 재난 생존자에게 수면은 단지 하루를 마무리하는 루틴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의 회복’, 다시 말해 생존을 넘어 ‘살아간다’는 의미로의 복귀를 상징하는 첫 번째 증거다. 수면 회복은 단순히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라, 무너진 일상 구조를 다시 세우는 결정적인 순간이며, 신체적 회복과 심리적 안정의 바로미터로 작용한다.

수면이 회복되면 생존자의 하루는 달라진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느끼는 무력감이 줄어들고, 뇌 기능과 집중력이 향상되며, 감정 조절 능력도 회복된다. 이는 곧 사회적 관계 회복, 업무 복귀, 가족과의 유대 강화로 이어지며, 생존자의 ‘삶의 질’ 전반을 끌어올린다. 실제로 수면장애가 지속되면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 의존, 대인 기피 등 2차적인 심리 증상으로 이어질 확률이 크게 증가한다. 따라서 수면 회복은 단지 신체 상태의 개선이 아닌, 전체적인 삶의 회복을 위한 선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면은 트라우마 치유 과정에서 기억의 통합과 정서의 조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렘(REM) 수면 단계에서는 감정 기억을 정리하고, 경험을 서사화하는 뇌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는 재난이라는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합해 나가는 데 핵심적인 기제로 작용한다. 깊은 수면 속에서 생존자는 ‘설명할 수 없었던 공포’를 감정적으로 재처리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거리로 이동시킨다.

상담자로서 수면 회복을 도와주는 일은 단순한 수면 코칭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졌던 삶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일, 즉 ‘일상 복귀의 설계’를 함께 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수면시간 확보, 깨어 있는 시간의 계획, 낮 활동의 구조화는 모두 회복 과정의 필수 요소다. 특히 일상성을 회복한 삶은 생존자에게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어”라는 강한 자기 확신을 심어준다. 이는 포스트 트라우마 성장(Post Traumatic Growth, PTG)의 기반이 되며, 단순한 증상의 완화를 넘어 ‘변화된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궁극적으로, 재난 이후 수면 회복은 ‘단절되었던 삶의 흐름’을 다시 이어 붙이는 일이다. 그것은 몸의 회복을 뜻하고, 마음의 안정감을 의미하며, 다시 관계 맺고 사회로 나아갈 힘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상담자는 생존자가 ‘다시 잘 수 있게 되는 것’의 가치를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지지하고, 그 변화가 자신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해야 한다. 수면 회복은 단순한 휴식이 아닌 삶의 중심으로 복귀하는 출입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생존자는 ‘그때의 나’에서 ‘지금의 나’로, 마침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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