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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의 흔적: 심리적 여진의 실체

재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여파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과정’에 가깝다. 겉으로는 건물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지만, 더 깊숙한 곳에서는 ‘마음의 구조물’ 또한 흔들리고 붕괴되는 충격이 발생한다. 특히 이 심리적 충격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음의 여진’처럼 반복적으로 생존자의 일상을 위협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그 대표적인 예로, 재난 상황을 겪은 지 몇 개월이 지나고도 악몽, 불면, 과각성, 회피 행동, 무감정 상태 등이 지속되며 생존자의 삶의 질을 크게 훼손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심리적 증상들이 처음에는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난 직후의 급성 스트레스 반응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오히려 심리적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약한 사람’이라는 오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생존자들은 “그래도 나는 다친 데 없이 살아있잖아”, “이 정도로 힘들면 안 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억누르며, 감정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심리적 여진을 ‘안으로’ 묻는 방식으로 작용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복잡하고 깊은 고통을 야기하게 된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 역시 심리적 여진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좀 괜찮아졌지?”, “그때 일은 그만 잊어야지”와 같은 말은 생존자에게 ‘말할 공간’을 닫아버리는 메시지로 전달된다. 말하지 못한 감정, 표현되지 못한 고통, 설명되지 못한 혼란은 결국 생존자의 내면에 고립된 채, 더 큰 정서적 파괴를 불러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심리상담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상담은 단순히 치료나 회복의 수단이 아니라, 여진이 반복되는 마음의 지층을 들여다보고, 그 안의 흔들림을 ‘말’과 ‘이해’를 통해 안정시키는 구조화된 과정이다.

재난 이후, 마음의 여진은 계속된다: 심리상담이 필요한 진짜 이유

 

2. 고통을 말하는 용기: 심리상담이 열어주는 회복의 문

많은 재난 생존자들은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단순한 체념뿐 아니라,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불러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심리상담은 단지 감정을 토해내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이해 가능한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과정, 그리고 지속되는 심리적 여진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삶의 흐름 안에 다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다. 상담자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 새로운 해석의 틀이 되며, 생존자가 혼란스러웠던 내면을 조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상담실 안에서 생존자는 처음으로 ‘평가받지 않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동안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너만 힘든 거 아니잖아”, “지나간 일은 그만 잊어야지”라는 식의 반응에 침묵을 선택했던 이들이, 상담자와의 관계 안에서는 “나도 아직 무너져 있어요”, “그때가 자꾸 떠올라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말 자체가 회복의 첫걸음이자, 고통을 구조화하는 행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가’,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날 이후 나는 어떤 감정으로 살아왔는가’를 말로 풀어내는 순간, 생존자는 자신의 고통을 외부화하고, 마침내 그 고통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또한 심리상담은 감정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생존자는 대개 자신의 고통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그것이 상대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고, 자신이 ‘불편한 존재’로 비춰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상담자는 그 감정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심리적 안전기지’다. “여기서는 어떤 감정도 괜찮습니다”, “힘든 감정을 꺼내는 건 용기 있는 일이에요”라는 상담자의 메시지는 생존자에게 감정을 소화할 수 있는 안전한 그릇을 제공한다. 그렇게 상담실은 말할 수 없던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3. 심리상담이 심리적 여진을 다루는 방식: 회복을 설계하는 전문가의 개입

재난을 겪은 뒤에도 지속되는 심리적 여진은 마치 끝나지 않는 지진처럼 삶의 구석구석을 흔든다. 수면장애, 분노 조절의 어려움, 이유 없는 무기력, 특정 장면에 대한 플래시백, 이유 모를 눈물-이러한 증상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기대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생존자들이 겪는 이 반복적 증상들은 단지 감정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일상 기능, 사회적 관계, 직업 수행 등 삶의 모든 영역을 위협한다. 심리상담은 바로 이 삶을 위협하는 무형의 지진파를 감지하고 조정하는 과정이다.

상담자는 생존자의 증상을 단순히 ‘치료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고통이 나타나는 맥락과 의미를 함께 분석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생존자가 “매일 같은 시간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안 와요”라고 말할 경우, 상담자는 그 시간대가 재난 당시의 특정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무의식적 감각의 잔존으로 작용하는지를 탐색한다. 이러한 분석은 생존자로 하여금 ‘나의 증상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반응’임을 인식하게 하며, 그 자체로 자기 수용의 시작이 된다. 이는 병리화를 방지하고, 회복 중심의 내러티브를 만드는 핵심 접근 방식이다.

또한 심리상담은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보다 먼저, 감정을 ‘느끼고 인식하는 감각’ 자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둔다. 재난 이후 생존자들은 종종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감정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 빠지곤 한다. 이는 감정 시스템이 고장 난 것이 아니라, 너무 큰 고통 앞에서 감정 자체가 마비된 결과다. 상담자는 ‘지금 이 감정이 어떤 느낌인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인지’를 함께 찾아가며, 감정을 말로 구조화하고 다시 몸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작업은 감정 조절 이전의 가장 중요한 회복 단계로, 생존자가 자기 내면과 다시 연결되는 통로를 열어준다.

심리상담은 또한 생존자가 스스로 회복을 설계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하도록 안내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 조절법이나 대처 전략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생존자의 내면에 있는 자원(resource)을 발굴하고 활성화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 힘들었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때 스스로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와 같은 질문은 생존자가 이미 갖고 있는 힘과 회복 능력을 재발견하게 한다. 이 과정은 생존자가 ‘치료받는 대상’이 아닌, ‘자신의 회복을 주도하는 주체’로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심리상담은 생존자와 상담자의 관계 자체가 회복의 자원이 되는 작업이다. 안전한 관계 안에서 생존자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며, 그 경험은 다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기반이 된다. “상담자 선생님은 내가 울어도 괜찮다고 해줬어요”, “그냥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큰 위로였어요”라는 말은, 상담 자체가 생존자에게 감정적으로 복구된 인간관계의 첫 시작이자, 관계 기반 회복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4. 살아가는 힘을 되찾다: 상담 이후 삶의 회복과 성숙

심리상담의 목적은 단순히 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시 감각하고, 의미를 되찾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복구하는 일이다. 재난 생존자들은 상담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처음으로 말할 수 있었고, 그 말들이 삶의 중심을 되찾는 지표가 되었음을 경험한다. 특히 상담이 지속되면서 생존자들은 “지금은 내 감정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이제는 누가 내게 무슨 말을 해도 덜 휘둘리는 것 같아요”라는 식의 성숙한 자기 인식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심리상담이 만들어내는 내면의 회복 곡선이다.

또한 상담을 통해 생존자는 ‘과거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앞을 향해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회복한다. 재난 트라우마는 흔히 생존자를 그 시점에 붙들어매고,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상담은 그 정지된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다. “이제는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 보고 싶어요”,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좋아요”와 같은 진술은, 생존자가 다시 자기 삶의 흐름을 주도하는 존재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심리상담은 생존자의 삶에 ‘새로운 의미 체계’를 부여한다. 트라우마는 인간의 세계관과 신념을 흔드는 사건이기 때문에, 회복은 단지 감정의 조절이 아닌, 삶의 재해석과 가치 재정립을 필요로 한다. 상담은 생존자에게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여전히 지키고 싶은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을 통해, 생존자가 재난 이후에도 삶을 다시 조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더 이상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새롭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상담을 통해 생존자는 ‘상처받은 존재’에서 ‘의미를 발견한 존재’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생존자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고통을 ‘사회적 기여’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보이곤 한다. 이때의 생존자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트라우마를 품은 채 살아가는 존엄한 존재이며, 삶의 깊이를 경험한 ‘회복자’이자 ‘공감의 전달자’로 성장한 사람이다.

결국 심리상담은 재난 이후 생존자의 삶을 다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게 하고, 이해할 수 없던 감정을 이름 붙이고, 잃어버린 삶의 조각들을 다시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가게 한다.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상담이라는 공간 안에서 생존자는 스스로 다음 장을 써 내려갈 힘을 키워간다. 심리상담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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