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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 재난 이후 감정마비의 실체

재난 이후 상담실을 찾는 많은 생존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아무 감정도 안 들어요”, “울지도 못하겠어요”, “기뻐야 할 때도 아무 느낌이 없어요.” 이는 단순한 슬픔이나 우울을 넘어선 ‘감정마비(emotional numbness)’ 현상이다. 감정마비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대표적 증상 중 하나이며, 강력한 심리적 충격 이후 생존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차단한 상태를 말한다. 이 현상은 외부에서 보면 무덤덤하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 체계 전체가 ‘정지 상태’에 빠져 있는 위기 신호다.

심리학적으로 감정마비는 신경계의 과부하와 감정 조절 시스템의 기능 저하로 설명된다. 재난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인간의 뇌가 생존을 위해 위협에 빠르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기능을 ‘일시 정지’시킨다. 이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로, 감정의 폭발이나 해체를 막고 최소한의 기능만 유지하려는 생존 전략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능 정지가 재난 이후에도 풀리지 않고 지속되는 데 있다. 평상시로 돌아왔음에도 생존자는 여전히 ‘위기 상황’의 틀 안에 갇혀 있으며, 감정 표현은 물론 감정 자체의 인식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감정마비는 단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이는 자기 인식의 왜곡으로까지 이어진다. “나는 냉정한 사람인가 봐요”, “내가 이상한 걸까요?”와 같은 자기비하가 반복되며, 생존자는 자신을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기 시작한다. 특히 주변에서 “그래도 살아있잖아, 감사해야지”, “이제는 좀 나아졌을 때 아닌가요?”와 같은 말을 들으면, ‘느끼지 못하는 나’에 대해 더 큰 죄책감을 갖는다. 상담자로서 이 감정마비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것은 단지 무감각함이 아닌, 감정 체계 전체가 고장 난 위기 상태이기 때문이다.

 

재난 이후 감정마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의 심리학

 

2. 감정 차단의 심리적 원인: 감정을 멈추게 만드는 방어기제들

감정마비는 다양한 심리적 메커니즘과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심리적 방어기제의 과도한 활성화다. 인간은 위협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재난과 같은 극심한 외상 경험 이후에는 이러한 방어기제가 만성화되며, 감정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감정 억압, 부정, 해리이다.

먼저 감정 억압(repression)은 의식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넘어서, 무의식적으로 감정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한 생존자가 사고 당시 자신이 얼마나 공포에 질렸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 당시 감정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이는 억압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는 너무 고통스러운 감정을 의식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일어나는 심리적 셧다운이다.

감정 부정(denial)은 생존자가 감정을 ‘있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하는 방어기제다. “전 괜찮았어요”,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라는 말 뒤에는 실제로는 감정이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스스로 부정하는 심리적 역동이 존재한다. 이때 생존자는 외부의 인정을 받기 어렵고, 오히려 ‘감정 없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한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해리(dissociation)**다. 해리는 감정과 신체 감각, 기억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는 현상으로, 생존자가 자신이 마치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상태에서는 감정뿐 아니라 현실감, 자기감각까지 흐려지며, 일상 기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감정마비는 종종 이러한 해리 증상과 병행되며, 생존자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상담자는 생존자가 감정을 차단하고 있는 이유를 비난이 아닌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감정 차단은 고장난 심리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생존자가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정상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전략이 현재 시점에서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회복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생존자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3. 감정마비에서 회복하기 위한 심리적 개입 전략

감정마비는 단순한 무감정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 회로 전체가 잠긴 듯한 상태로, ‘무감각’이라는 고통 속에 갇힌 생존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들을 회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정을 ‘억지로 꺼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안전하게, 자기 속도로 다시 느끼도록 안내하는 작업이 핵심이다. 상담자는 조급하지 않아야 한다. 감정마비는 풀려야 할 매듭이지, 풀어야 할 매듭이 아니다.

첫 번째 단계는 신체감각 회복을 통한 정서 자각의 회복이다. 감정은 본래 신체에서 출발한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처럼, 감정은 몸에서 느껴지는 반응이다. 그러나 감정마비 상태에 있는 생존자들은 신체감각 자체가 단절되어 있어 “어디가 불편한지도 모르겠어요”, “답답하긴 한데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럴 때 상담자는 ‘몸의 언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둔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얘기를 하실 때 몸에서 어떤 느낌이 드세요?”, “답답함에 색깔이나 온도를 붙인다면 어떤 이미지일까요?”와 같이 신체와 감정을 다시 연결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 작업은 ‘지금-여기’에서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시 연습하는 출발점이 된다.

두 번째는 감정 안전망 구축이다. 감정마비를 겪는 생존자는 감정이란 ‘터지면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차단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여긴다. 따라서 상담자는 감정이 ‘터져도 괜찮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담자와의 관계 안에서 감정을 표현했을 때 받아들여지고, 조율되고, 해석되지 않으며, 존재 자체로 수용받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지금 그런 감정이 드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요”, “말씀하시면서 힘드셨죠. 천천히 가셔도 괜찮아요”와 같은 반응은 감정을 다시 꺼내게 만드는 ‘안전한 기초’가 된다.

세 번째는 감정 경험의 서서한 확대다. 갑작스러운 감정 폭발이나 억지 회상은 오히려 해리나 재충격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감정부터 천천히 느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 중에 조금이라도 편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 순간 기분이 100점 만점에 몇 점쯤이었을까요?”처럼 미세한 감정의 결을 찾아가는 대화를 반복하면서, 생존자는 서서히 감정의 폭을 다시 넓혀갈 수 있다. 이 과정은 감정을 인식하고, 이름 붙이고, 조절하는 3단계 구조로 이어져야 한다. 감정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통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감각을 되찾게 되며, 이는 곧 자기 조절력 회복의 핵심이 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감정을 느껴도 되는 나, 감정을 말할 수 있는 나라는 자기 정체성의 회복이다. 감정마비는 ‘감정을 느끼는 나를 부정’하는 구조이기에, 감정을 회복하는 작업은 곧 ‘존재 회복’의 과정이다. 상담자는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과거의 경험에서 어떤 감정이 억압됐는지 탐색함으로써, 생존자가 감정으로 인해 거절당하거나 처벌받았던 기억을 다시 바라보게 해야 한다. 그렇게 감정은 다시 말할 수 있는 것이 되고, 표현해도 되는 것이 되며, 마침내 ‘나의 일부’로 복귀하게 된다.

 

4. 다시 느끼는 나로 살아가기: 감정 회복이 주는 의미

감정 회복은 단지 기쁘고 슬프고 화나는 감정을 다시 경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을 통해 삶을 다시 느끼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되찾는 일’이다. 재난 생존자에게 감정은 오랜 시간 닫아두었던 창문과 같다. 외부의 소리와 바람, 햇살을 끊고 안으로 틀어박혀 살아온 시간 이후, 다시 창을 여는 순간, 생존자는 세상과 감각, 타인과 감정적으로 다시 연결된다. 감정을 다시 느낀다는 것은 결국 세상과 다시 통하는 감각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감정이 돌아오면 생존자는 다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내가 왜 우는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던 생존자가, “지금은 제가 왜 우는지 알겠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트라우마에 휘둘리는 대상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감당하며, 자신의 삶에 방향을 줄 수 있는 주체로 돌아온다. 이는 단지 감정 표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며, 삶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다.

더 나아가 감정 회복은 관계 회복으로 확장된다. 감정은 결국 타인과 연결되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생존자가 타인의 기쁨에 공감하고, 슬픔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순간, 그는 다시 관계 속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때 상담자는 그 감정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고, 흘러가도록, 때로는 머물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선택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감정을 회복한 생존자는 타인의 감정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세상을 새로운 감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감정은 이렇게 생존자의 사회적 감각을 회복시키는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정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라는 점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을 때, 생존자는 삶의 선택 앞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감정을 잃은 상태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조차 알 수 없지만, 감정이 돌아온 순간, 생존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질문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외상의 생존 단계를 넘어 삶의 재건과 재창조의 단계로 넘어가는 변화다.

결국 감정 회복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나로 살아가는 일’이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서의 나, 감정에 흔들리더라도 견딜 수 있는 나, 감정을 말할 수 있고 그것으로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나. 상담자는 이 여정의 곁에서 생존자가 자기 안의 감정을 발견하고, 꺼내고,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감정을 느끼는 생존자는, 더 이상 트라우마 속에 고립된 피해자가 아니라, 감정을 통해 삶을 주도해 나가는 회복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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