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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아이의 고통을 인식하는 부모의 첫걸음

재난이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말 없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겉으로 특별한 문제를 보이지 않으면 ‘잘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말로 감정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조용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유아와 아동은 감정 조절 능력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재난 이후의 스트레스를 행동, 신체 증상, 또는 무기력함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이런 변화를 민감하게 인식하지 못할 경우,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이중의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심리적 고통은 갑작스러운 울음, 분리불안, 야뇨, 집중력 저하, 반복적인 질문, 공포 반응, 반복적 놀이 행동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때 부모는 단순히 “왜 그러니?”,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로 넘어가기보다는, 아이의 행동 이면에 어떤 감정이 있는지를 헤아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혹시 무서웠니?”,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처럼 아이의 감정에 접근하는 질문을 던지고, 아이가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부모가 감정을 대신 말해주기보다는, 아이가 자기 감정을 발견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또한 부모는 아이의 반응을 ‘비정상적인 반응’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외상 후 반응은 개인마다 다르고, 특히 아이들은 성장 발달 단계마다 스트레스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따라서 아이의 반응은 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으로 이해하고, 이를 비난하거나 과도하게 걱정하는 대신 차분히 지켜보며 지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심리적인 상처는 억지로 꺼내서 드러내기보다는, 안전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드러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부모를 위한 재난 후 아동 심리 지원 전략

2. 회복의 토대 만들기: 아이에게 안전과 예측 가능성을 되찾아주기

재난을 경험한 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로 인해 세상은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아이의 기본적인 정서 안정감과 신뢰감을 크게 훼손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모가 아이에게 다시 제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하다’는 감각과 예측 가능한 일상입니다. 이것은 단지 집이 안전하다는 물리적 의미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이제 괜찮아”, “엄마 아빠가 옆에 있어”라는 심리적 확신을 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먼저 일상적인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식사 시간, 수면 시간, 놀이 시간 등의 생활 리듬을 가능한 한 재난 이전과 비슷하게 유지하거나, 새롭게 안정적으로 구성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측 가능한 하루는 아이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만약 거주 환경이 바뀌었다면, 새로운 환경을 함께 정리하거나 꾸미는 활동을 통해 아이가 지금 이곳도 ‘내 공간’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에게는 ‘내가 다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구나’라는 회복 신호로 작용합니다.

이와 함께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재난 이후 아이가 두려움, 불안, 분노,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반응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받아주고, 정리해 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게 무서웠구나”, “그래서 많이 속상했겠다”처럼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방식은 아이가 자기 내면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감정을 억누르게 되면 이후에 더 큰 불안이나 분노, 또는 무기력으로 터져나올 수 있으므로,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하고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간단한 호흡법, 몸풀기 활동, 감정 색칠 놀이, 오늘의 기분 일기 쓰기와 같은 활동은 감정을 조절하고 표현하는 연습이 됩니다. 부모가 함께 참여하면서 “엄마도 오늘 무서운 꿈 꿨어. 이런 날은 같이 그림 그리는 게 좋아”와 같이 자기 감정도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아이는 감정 표현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3. 상담과 연계하기: 부모가 알아야 할 심리치료의 타이밍과 방식

아동의 심리적 회복은 많은 경우 부모의 지원만으로도 일정 부분 가능하지만, 때로는 전문가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전문적인 심리치료는 또 다른 차원의 개입이기에 그 필요성과 타이밍을 적절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은 “상담까지 받을 정도일까?”, “괜히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 때문에 개입 시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떤 신호를 기준으로 아동 심리상담을 고려해야 할까요?

먼저, 아이가 재난 이후 한 달 이상 반복적으로 악몽을 꾸거나, 특정 상황을 반복적으로 회피하거나,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줄 정도의 두려움이나 감정 기복을 보인다면 전문 상담이 필요합니다. 또한, 예전에는 하지 않던 자해적인 행동, 뚜렷한 신체 이상 없이 계속되는 통증 호소, 심각한 식욕 저하나 과잉 섭식, 분리불안이 극도로 심해지는 경우도 심리적 외상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일상 기능에 영향을 줄 정도의 변화가 일정 기간 지속된다면, 단순한 회복 지연이 아닌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PTSD)으로 이행될 수 있으므로 조기 개입이 필수적입니다.

상담을 시작할 때 부모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원칙은 ‘아이의 준비 정도를 존중하되, 지나치게 묻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나 상담받기 싫어”, “나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단호하게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는 거부라기보다는 아직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담이라는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감이 투사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때는 억지로 상담을 권하기보다는 “요즘 네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 “필요하면 우리 함께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자”는 식으로 상담의 목적을 ‘문제 해결’보다는 ‘도움을 받는 하나의 방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심리치료 방식은 아이의 연령과 특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아와 초등 저학년의 경우에는 놀이치료와 미술치료가 주로 활용되며, 청소년의 경우에는 인지행동치료(CBT), 심리역동적 상담, 가족상담 등 다양한 접근이 병행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어떤 형태의 치료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상담자와 정기적으로 소통하고, 치료 목표와 방향에 대해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상담 내용을 세세히 묻기보다는, “요즘 상담 다녀온 후 어때?”, “상담 선생님이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어?” 같은 부드러운 질문을 통해 아이와의 대화를 유지하면서도 감시하는 느낌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심리치료가 단기간에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지 않더라도 과정을 믿고 기다려주는 태도입니다. 아이의 정서적 회복은 직선적이기보다는 흔들리고 반복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어떤 날은 좋아졌다가도 다시 불안해지고, 일상이 안정돼 보이다가도 특정 기념일이나 뉴스 보도로 인해 과거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흔합니다. 부모는 이러한 회복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아이가 자신의 속도대로 감정을 정리할 수 있도록 옆에서 안정적인 버팀목이 되어줘야 합니다.

 

4. 부모 자신도 치유받아야 한다: 아이와 함께 건강하게 회복하기

재난을 경험한 아이를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모일수록 자신이 얼마나 지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지금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절박한 책임감은 부모를 긴장 상태에 지속적으로 묶어두고, 결국에는 부모 자신의 심리적 번아웃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아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것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지만, 부모 자신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의 심리를 온전히 지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재난으로 인해 가족 전체가 물리적 손실을 입었거나, 경제적 위기나 관계 단절을 경험한 경우에는 부모 역시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때 부모가 감정을 억제하거나 무시한 채 일상으로 복귀하려 하면, 신체적 피로감, 과민 반응, 우울감, 무기력, 짜증, 수면 장애 등의 문제가 서서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이러한 상태에 놓이면 아이는 이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엄마가 힘들어 보여서 내 얘기를 못하겠어요”라는 식으로 자기 표현을 억누르게 됩니다. 결국 부모의 감정이 조절되지 않으면, 아이의 회복에도 간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의 심리적 회복을 도우려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회복도 동시에 고려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무서웠다”, “나는 아직도 어떤 때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부모는 아이에게 감정 표현의 모델이 되어주며, 건강한 감정 소통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결코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도 자연스럽고 소중한 삶의 일부임을 가르치는 교육적 행동입니다.

또한 부모가 필요할 경우 개별 상담이나 부모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부모를 위한 재난 스트레스 관리 교육, 심리안정 기법(예: 이완 호흡, 감정일지 작성), 가족 상담 등의 자원을 활용하면, 단지 정보를 얻는 것을 넘어서 감정적으로 ‘버팀목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위한 상담만큼이나 부모 자신을 위한 회복도 함께 고려될 때, 비로소 가족 전체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끝으로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지원은 ‘함께 존재해주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도, 그저 옆에 앉아 함께 있는 시간, 아이가 눈을 마주쳤을 때 흔들리지 않는 시선, 무심한 듯 따뜻하게 건네는 “괜찮아, 여기 있어”라는 말은 그 어떤 전문적인 상담보다도 아이의 회복을 견인하는 심리적 앵커(anchor)가 됩니다. 부모가 자기 자신을 잘 돌볼 수 있어야, 아이도 결국 그 부모를 보며 ‘나도 괜찮아질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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